몇일 전 유트브 쇼츠에서
독립운동을 패러디한 영상을 보았다.
확실한 이름이 나오진 않았지만
나는 주인공이 연기한 실존인물이 이봉창 열사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아직도 머리에 생생히 기억한다
유트브에서 이봉창 열사 역활을 하는 배우가
김구 역활을 하는 배우에게 한 대사를...
"인생의 목적이 쾌락이라면 30년동안 충분히 즐겼습니다.
이제 영원한 쾌락을 도모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독립사업에 뛰어들기 위해
상하이로 왔습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영원한 쾌락을 위해 가는겁니다.
이제 최고의 쾌락을 위해 한 목숨 바쳐 독립운동을 하겠습니다!"
필자는 중학생 고등학생 때 나름 한국사에 관심도 좀 있었고
공부했다고 생각했는데
이봉창 선생님이 독립열사라는 것까지는 기억나는데
정확히 무슨 일을 했는지
또 그 사람의 일대기에 약간의 묘한 이질감이 드는지
명확한 기억이 나질않았다.
사람이란 존재는 호기심이 왕성하다고 했던가!
바로 자료 찾아보기 시작했다 ㅎㅎ
이봉창 선생님은 1932년 1월 8일 일본 도쿄에서
삼엄한 경호를 받으며 궁성으로 돌아가던 일왕에게
수류탄을 투척하여 일본인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고
전세계 피압박 민족들에게 큰 충격과 가능성을 안겨주었다.
또한, 이봉창 선생님의 수류탄 거사는 비록 실효를 거두지는
못하였으나 당시 일제강점기 시절 독립을 위해
설립된 상하이 대한민국임심정부에 새로운 방향성을
마련해주었다.
이봉창 선생님의 일왕 폭탄사건은 성공과 실패로만 볼 수 없었던게
그 한사람의 목숨을 건 이러한 독립행위가 추후에
지속적인 독립운동으로 퍼져나가게 한 불씨였던 것이다
특히, 그 이후에 독립운동을 한 윤봉길 의사로
이러한 지속적인 독립운동은 불을 지피게 된다.
그런데, 이봉창 열사의 일대기에는 다른 독립운동가와
달리 과거의 묘한 역사가 있었다.
그는 누구보다도 일본의 선진문물을 빨리 받아들였다고 한다.
이봉창 열사의 일대기를 살펴보자.
이봉창 선생님은 1901년 8월 10일에 태어나
그는 *천도교가 세운 문창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상급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한학 공부를 하였다.
*천도교: 동학을 계승하여 발전된 한국의 신흥 종교이다.
가난한 형편때문에 어려서부터 일찍 일을 시작하였다.
1913년부터 일본인 과자점의 점원으로서 일을 하였고
1917년에는 용산 원효로에 있는 일본인 경영의 화전상점
점원으로 일하다가 1919년 해고당하였다.
1920년에는 용산역 만선철도의 기차운전견습소의 역부로
일을 하였다.
그는 어릴 때 수년간 열심히 일하였으나
일본인 점주나 사장들은 그가 "조선인"이라는 것 때문에
임금이나 채용에 대한 기본적인 권리를 충족해주지 않았다.
예를 들어, 똑같은 점원으로 일한 일본인과 본인의 임금이
2배 차이난다거나 다른사람이 점원으로 들어오면
적합한 사유없이 바로 해고를 한다던가 등의 부당한 대우를
많이 받았다.
1921년경 한.일간의 임금 격차 문제에 수년간 체감을 하면서
항일의식이 그의 마음에서 서서히 자리잡기 시작하였다.
다만, 이봉창 열사는 당시까지는
"조선에 있어서 내가 조선이으로 차별을 받을 수 있구나.
그렇다면 일본에 가서 열심히 일해서 이러한 차별을 받지말자"
고 생각하여 일본으로 넘어가 이름도
"기노시타"로 바꾸고 일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그는 일본에서도 여러 업소에서
일을 배우면서 하였는데
평소 그의 성품상, 현재 흔히 우리가 말하는 "월급루팡"이
절대 불가능하였고,어렸을 때부터 가난한 집안형평상
반드시 기술을 배워 독립하고자 하는 의지가 강했기에
그 누구보다도 열심히 일을 했다고 한다.
현재의 우리나라 워킹홀리데이도 비슷할 수 있겠지만
그보다 훨씬 심각한, 차등대우를 받으면서
조선에서도 1/2정도의 월급여를 받았던 시련이
일본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일본인으로서 살아야
조선인으로서 사는것보다는 차별을 덜 받는다고
생각했기에 어쩔 수 없이 묵묵히 일을 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바꾼 일화가 있었다.
1928년 일왕 즉위식을 보러 갔었는데
일본 경찰들이 그의 몸에서
한국말로 작성된 편지 한장을 보고
이유도 없이 경찰서 유치장에 10일동안
가두었다.
이봉창 열사는 너무나 화가났었고
억울했었다. 그래서 더더욱 일본인으로 살고자
마음을 먹었다.
그는 더욱더 일본인으로서 살기를 원했고
아무도 모르는 일본 지역으로 가서
정착을 하면서 살기 시작했다
하지만....시간이 지날수록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일본인들의
조선인들에 대한 차별, 억압, 탄압 등을
자주 접할 수 있었고, 그의 마음속에서
싹트기 시작한 불편함, 불쾌함, 분노 등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는 결국 깨닫기 시작했다.
일본인으로 사는게 정답이 아님을...
그는 조선인이며, 스스로 조선인으로 살아야하고
그래서 일본에 맞서 싸워야함을
그리고 그는 상하이의 임시정부를 찾아가
김구를 만났고
김구는 그의 과거를 의심할 수도 있었지만
이봉창의 기개와 눈빛, 분위기를 보면서
그가 독립열사로서의 자격을 갖췄음을
파악했다.
이봉창 열사는 김구를 만나
완전한 독립운동가로 다시 태어났으며
이러한 의지로 1932년 1월 8일 일본 도쿄에서
삼엄한 경호를 받으며 궁성으로 돌아가던 일왕에게
수류탄을 투척하여 일본인들에 대한 동포들의
마음속에 독립을 위한 희망의 불씨를 살리고
일본인의 경각심을 높였다.
이봉창열사님 그리고 여러 독립운동을 하셨던
모든 분들께...바칩니다.
"자랑스럽습니다. 존경합니다.
독립된 조국에서 감사히 살겠습니다."
읽어봐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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